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神신이 전한 漢字한자의 수수께끼: 깨달을 '오(悟)'

 

 

설문해자(說文解字)의 저자 허신 許愼 ]

 

 

 

 

神신이 전한 漢字한자의 수수께끼: 깨달을 '오(悟)'

 

 

 

 

신이 전해준 한자 중에 깨달음을 뜻하는 "오(悟)"에 담긴 의미는 무엇일까? 

 

 

깨달을 "오(悟)"는 "五目", 또는 "忢"라고 쓴다.

 

『설문해자(說文解字)』에서는

 

"오(悟)란 깨달음(覺)이다. 心은 의미 부분이고 吾는 발음 부분이다. 고문 오(悟)이다."라고 풀이했다. 다시 말해 "오(悟)"란 바로 깨달을 "각(覺)"이란 뜻이다.

 

 

그렇다면 "각(覺)"에는 또 어떤 의미가 담겨 있을까? 

 

『설문해자(說文解字)』에서는 

 

"覺,寤也. 從見學,省聲. 一曰發也."

 

각(覺)이란 깨어있다(寤)는 뜻이다. 견(見)과 학(學)은 의미부분이며 발음부분은 생략되어 있다. 일설에는 발(發)이라고도 한다"라고 했다.

 

 

즉 각이란 바로 "오(寤)"란 뜻이 되는데 그렇다면 "寤"에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

 

『설문해자(說文解字)』에서는

 

"寤,寐覺而有信曰寤. 從夢省吾聲. 一曰晝見而夜夢也. ,籀文寤."

 

오(寤)란 잠에서 깨어 믿음이 있는 것(寐覺而有信)을 가리켜 오라 한다. 몽(夢)은 의미 부분이고 오는 발음 부분이다. 일설에는 낮에 본 것을 밤에 꿈꾸는 것이라고 한다. 주문(籀文) 오이다"라고 했다.

 

그러므로 "매(寐)"란 잠들었다는 것이고 "오(寤)"란 잠에서 깼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서 "오(悟)"란 "각(覺)"이며 "잠에서 깨어난다(寤)"는 뜻이 된다.

 

 

우리가 깨닫는 곳이 바로 마음속이기 때문에 "오(悟)"에 심(忄=心)이 들어있는 것이다. 물론 깨달음은 사부나 경서(經書)의 "점화(點化)"를 통해 얻을 수도 있지만 궁극적인 귀결은 여전히 자기 마음속에서 적극적으로 깨달아야 하고 자신의 사상이 능동적으로 깨달아야 한다. 아울러 당신이 깨닫는 것 역시 단지 마음속으로만 이해하고 깨달을 뿐이다. 다시 말해 마음으로는 알 수 있지만 말로는 전해줄 수 없으며 말로 표현하고자 해도 할 수 없고 글로 쓰고 싶어도 쓸 수 없는 것이다. 

 

당신이 만약 정말로 말로 표현하거나 글로 쓸 수 있다면 깨달음의 의미가 변하는데 원래의 그런 뜻이 전혀 아니다. 만약 다른 사람이 한 말에 따라 깨달을 수 있다거나 혹은 자신이 깨달은 것을 모두 말로 표현할 수 있다면 그럼 깨달을 오(悟)의 부수는 마땅히 심(心)이 아니라 구(口)가 되어야 할 것이다.

 

 

한편 오(悟)의 이체(異體)자 중에 "五+目"로 된 글자가 있다. 다시 말해 위는 五이고 아래는 目인 글자이다. 이것은 아마도 수련자가 일정한 경지에 도달하면 공능이 나오고 천목(天目)이 열리는 현상을 지칭한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천목에는 육안(肉眼), 천안(天眼), 혜안(慧眼), 법안(法眼), 불안(佛眼)의 5대 층차가 있기 때문이다. 때문에 깨달음을 뜻하는 글자에 목(目)이 들어가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깨달아야(悟)" 하는가? 왜냐하면 우리가 일찍이 미몽(迷夢)에 빠져 있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흔히 인생은 꿈과 같다고들 한다. 내 생각에 우리 인생이란 이 꿈에는 작은 꿈이 있고 큰 꿈이 있으며 또 보다 높은 층차의 꿈이 존재한다. 

 

 

 

 

"큰 꿈에서 누가 먼저 깨달았는가? 오늘에야 나 홀로 알았노라. 초가집 봄잠에서 느즈막히 깨어나니 창밖에 해가 길어졌구나." '삼국지'에서 제갈공명이 한 말이다.

 

동한(東漢) 말기에 유비(劉備)는 큰 뜻을 품고 제갈공명을 만나기 위해 호북성 양양(襄陽) 융중(隆中)을 찾아갔다. 삼고초려 끝에 겨우 공명을 만났지만 마침 공명은 낮잠에 취해 있었다. 유비가 밖에서 한참을 기다린 후에야 공명이 잠에서 깨어 위와 같은 시를 읊었다. 공명은 이미 초가집 문을 나서기도 전에 조조, 유비, 손권이 장차 천하를 삼등분하여 위(魏), 촉(蜀), 오(吳) 삼국이 정립할 것임을 예견했다. 유비는 공명의 비범한 재능에 탄복하지 않을 수 없었으니 이것이 바로 저 유명한 "융중대(隆中對)"이다. 

 

 

그럼 작은 꿈이란 무엇인가? 바로 우리가 매일 잠자는 것이다. 당신이 잠에서 깨어나면 이것을 "오(寤)"라 하며 또 "각(覺)"이라고도 하는데 또 "오(悟)"라고도 한다.

 

큰 꿈이란 무엇인가? 바로 인생의 미몽(迷夢)을 말한다. 사람이 속세에 오게 되면 곧바로 미혹 속에서 명예와 이익에 얽매이고 칠정육욕 속에서 길을 잃고 술, 여자, 재물, 분노에 미혹된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홍진(紅塵)에 미혹된 것으로 바로 이 세속에 미혹된 것이다. 당나귀에게 밀을 빻게 할 때 눈을 가리는 것처럼 사람 역시 이 한 쌍의 육안(肉眼)에 의해 가리워져 있다. 

 

우리 인간의 육안은 앞을 보면 뒤를 보지 못하고 빛은 보지만 어둠은 보지 못하며 표면은 봐도 속은 볼 수 없고 거짓은 봐도 진실은 보지 못하는데 즉, 다른 공간의 진실한 모습(眞相)을 볼 수 없다. 우리는 또 "냄새나는 가죽주머니"와도 같은 육체를 가지고 있다. 육체는 둔하고 무거우며 커지거나 작아질 수 없으며 공중에 날아오를 수도 없다. 또 배고픔과 갈증 추위와 피로를 두려워하며 생로병사를 겪어야만 한다. 

 

 

우리의 뇌는 마치 관음보살이 손오공의 머리에 굴레를 씌운 것처럼 겨우 30%의 능력만 사용할 수 있을 뿐이다. 이 모든 것은 층층의 질곡(桎梏)이 되어 우리에게 족쇄를 채웠고 사람으로 하여금 조금도 움직이지 못하게 만들었다. 

 

"큰 꿈에서 누가 먼저 깨달았는가?" 당신이 이런 표면적이며 가식적인 것들을 꿰뚫어볼 수 있다면 당신은 수련을 통해 이런 것들을 제거할 수 있으며 반본귀진할 수 있고 층층의 이런 질곡들을 타파해 당신의 본성을 되찾을 수 있다. 이렇게 하면 당신의 각종 본능이 되돌아 나올 수 있으며 당신의 큰 꿈인 인생이란 미몽에서 깨어나게 될 것이다. 당신은 미혹을 타파하고 대지대혜(大智大惠)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잠에서 깨어나는 것이며 깨달음이다. 당신의 깨달음이 일정한 정도에 도달하면 당신은 곧 원만하게 되는데 불가에서는 성불(成佛)하게 되고 도가에서는 진인(眞人)이 될 수 있다고 한다. 다시 말해 사람이 신(神)으로 수련 성취될 수 있다. 

 

사실 명백히 말하자면 인류사회란 바로 우리의 감옥으로 우리는 고생스럽고 미혹에 빠진 이 인류사회로 떨어져 내려온 것이다. 사람이 만약 병이 낫고 싶고 재난을 물리치며 업을 없애고 싶다면, 속세란 이 감옥에서 벗어나고 싶다면 그럼 고생을 겪어야 하며 수련해야 한다. 바로 미혹 속에서 깨달아야만 비로소 반본귀진할 수 있고 우리가 원래 있었던 천국으로 되돌아갈 수 있으며 깨달음에 의해 원만할 수 있다.

 

 

앞에서 필자는 인생에는 3가지 종류의 꿈이 있다고 했는데 작은 꿈, 큰 꿈과 보다 높은 층차의 꿈이 그것이다. 그렇다면 보다 높은 층차의 꿈이란 무엇일까?

 

만약 당신이 인생이란 큰 꿈에서 깨어났다고 하여 당신이 깨달았고 모든 불법(佛法)을 깨달았다고 할 수 있는가? 당신이 최고의 불법을 깨달았다고 할 수 있는가? 답은 물론 아니다. 왜냐하면 불법에는 층차의 구분이 있으며 불법에 대한 우리의 인식 즉, 깨달음(悟)에도 층차의 구분이 있기 때문이다. 서로 다른 경지에는 각기 다른 경지의 꿈이 존재하며, 서로 다른 경지의 꿈에는 서로 다른 경지의 "깨달음"이 존재한다.

 

철학용어로 말하자면 이것은 곧 상대적인 진리와 절대적인 진리의 문제이다. 당신의 층차가 아무리 높거나 또는 아무리 낮을지라도 당신보다 층차가 낮은 것에 대해서는 무엇이든 다 알 수 있다.

 

이는 마치 "마땅히 산정에 올라, 작아진 뭇 연봉 굽어보리라 會當淩絕頂,一覽衆山小" 라는 두보의 시 '망악(望嶽)'과도 같다. 

 

 

하지만 당신이 설사 여래부처만큼 그렇게 높이 깨달았을지라도, 당신이 설사 노자, 석가모니, 예수처럼 그렇게 높이 깨달았을지라도 당신보다 더 높은 층차에 대해서는 여전히 모른다. 단번에 우주의 최고특성을 깨닫고 최고의 불법을 깨달으며 우주의 수수께끼를 깨달을 수 있는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당신보다 아래에 있는 것은 이미 명백히 깨달았지만 당신보다 위에 있는 것은 당신에게 있어 여전히 꿈이며 이것이 바로 보다 높은 층차의 꿈이다. 바꿔 말하자면 당신이 깨달은 불법에는 상대성이 있고 당신이 깨달은 진리에는 상대성이 있는 것으로 당신이 최고의 불법을 깨달은 것이 아니라면 당신은 절대적인 진리를 깨달을 수 없다. 

 

 

 

 

"그렇다면 무엇이 불법인가? 이 우주 중의 가장 근본적인 특성 眞(쩐)·善(싼)·忍(런), 그가 바로 불법의 최고 체현이며, 그가 바로 가장 근본적인 불법이다. 불법은 부동한 층차 중에서 부동한 체현 형식이 있으며, 부동한 층차 중에서 부동한 지도 작용이 있는데, 층차가 낮을수록 표현이 더욱 번잡하다. .…중략…. 수련하는 사람이 어느 층차까지 수련되면 다만 그 층차 중의 불법의 구체적인 체현을 인식할 수 있는데, 이것이 바로 수련한 과위(果位)·층차(層次)다." 『전법륜

 

이것이 바로 불법에는 층차의 구분이 있고 수련자의 불법에 대한 인식인 깨달음에도 층차의 구별이 있다는 말이다. 나는 이것이 바로 깨달음의 원리라고 본다. 설사 대각자(大覺者)라 할지라도 낮은 층차에서는 높은 층차의 일을 알 수 없다. 가령 여래부처, 보살, 나한은 물질의 구조에 대한 인식이거나, 자비에 대한 인식이거나 인식이 다 다르다. 나한은 보살만큼 높은 경지가 없고, 보살은 또 부처만큼 높은 경지가 없으며 부처 역시 그보다 더 높은 대각자의 경지가 없기 때문에 각자의 층차에서 인식이 달라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깨달음에는 층차가 있고 매 층차의 깨달음에는 모두 국한성이 있지만 당신이 이 층차에서 깨달은 법리는 이 층차에서 지도적 의미가 있다는 뜻이다. 서로 다른 층차, 서로 다른 공간에서는 설사 동일한 '금강경'이라 할지라도 그 함의와 의미가 전혀 달라지며 심지어 글자조차도 같지 않다. 높은 층차에 도달하면 인류의 단어나 말, 어법과 논리, 사유방식으로는 도저히 담아낼 수 없으며 표시할 방법이 없다.

 

 

『전법륜에는 '금강경'보다 훨씬 높고 다양한 층차를 포함하는데 당신이 아무리 높은 층차까지 깨달을 수 있을지라도 모두 당신의 수련을 지도할 수 있다. 그렇다면 수련의 층차는 대체 얼마나 많이 존재하는가?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이 많다. 매 층 공간의 입자는 크기가 서로 다르며 서로 다른 입자는 서로 다른 공간을 구성하는데 우주 중에는 서로 다른 공간이 무수히 많이 존재한다. 

 

당신이 어느 경지까지 깨달을 수 있다면 당신은 곧 그 공간에 진입할 수 있는 것이다. "물고기가 마음껏 놀 수 있는 것은 바다가 넓기 때문이며 새가 자유로이 하늘을 나는 것은 하늘이 높기 때문이다." 이번 우주 정법(正法)은 천 년 만 년에도 만나기 어려운 좋은 기회이니 당신에게 능력이 있다면 한번 깨달아보기 바란다!

 

 

작자:우한런(武漢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