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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중국 신장의 장기적출: 정치범 장기적출에서 시작된 베이징의 '뉴 프론티어 정책' - 에단 구트만, 2011.12.05

 

 

 

 

 

중국 신장의 장기적출: 정치범 장기적출에서 시작된 베이징의 '뉴 프론티어 정책' - 에단 구트만, 2011.12.05

 

 

 

미국 탐사보도 저널리스트인 에단 구트만 Ethan Gutmann 은 2차례에 걸쳐 노벨 평화상 후보에 선정됐습니다.

 

 

단 구트만은 2006년 캐나다 인권 변호사 데이비드 메이터스와 전 캐나다 아·태 담당 국무장관 데이비드 킬고어와 함께 중국의 불법 장기적출 실태를 파헤친 중국 내 파룬궁 수련자 장기적출 의혹 조사 보고서인 ‘핏빛 장기적출(Bloody Harvest)’ 발표를 통해 2010년 첫번째 노벨 평화상 후보에 올랐습니다.

 

 

 

2016년 6월, 에단 구트만은 2006년 조사 보고서와 2007년 조사 보고 개정판에 추가해, 지난 16년간 지속된 중국공산당에 의한 파룬궁수련생 강제장기적출 최신 조사보고서 '언 업데이트(An Update)'를 통해 중국 국영 병원이 파룬궁 수련자의 장기를 대규모로 적출하고 있다는 사실을 밝혀냄으로써 2017년 두번째 노벨 평화상 후보에 올랐습니다.

 

 

 

 

 

 

그에 앞서 그는 2014년 자신의 저서 ‘대학살(The Slaughter)’에서 6년간 중국인 이민자, 의사, 변호사를 100명 넘게 인터뷰한 내용을 토대로 중국에서 불법 장기적출이 사실임을 밝힌 바 있습니다.

 

또 에단 구트만은 메이터스, 킬고어와 함께 미 연방 의회, 영국 의회 등의 공청회에 참석해 중국의 파룬궁 수련자를 상대로 한 장기적출 문제의 심각성을 지속적으로 제기했습니다. 그 결과, 2013년 12월12일 유럽연합(EU)은 ‘중국 내 강제장기적출 반대 결의안’을 통과했고, 2015년 3월25일 유럽연합 회원국 중 14개 국가가 강제 장기적출 반대법에 처음으로 조인했습니다. 이 법안은 강제 장기적출 반대 관련 세계 최초의 조약입니다. 2015년 6월12일, 대만 장기이식 법령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했습니다. 이 법안은 자국 국민의 불법 장기이식 관련 해외여행을 금지하고 불법 장기이식자 및 관련 의료인을 처벌합니다. 2016년 6월16일, 미하원은 343 결의안을 만장일치로 통과시켰습니다. 이 결의안은 중국 정부의 '양심수' 장기적출 즉각 중단을 요구하고 장기적출 및 불법장기이식 범죄 관련자의 미국 입국 금지, 장기이식기술을 제공하는 미국 의료계의 각성을 촉구했습니다. 또한 근본적인 조치로 중국 정부에 구금된 파룬궁수련자와 기타 양심수 전원 석방과 파룬궁에 대한 인권탄압 중지를 요구했습니다. 

 

 

 

에단 구트만의 조사결과는 실제 강제 장기적출과 이식수술에 연루된 의료계 종사자들의 증언을 바탕으로 합니다. 또 중국의 장기이식이 급증하고 비정상적인 장기이식산업이 발전한 2000년 이후의 증언뿐만 아니라, 2000년 이전의 장기적출에 대한 생생한 증언과 증거가 포함되어 있어 중국의 불법 장기적출과 장기이식 산업의 뿌리깊은 역사를 폭로하고 있습니다. 그 중 하나가 2011년 미국 The Weekly Standard 를 통해 발표된 아래 기사입니다. 은밀했던 신장 지역 정치범의 장기적출로부터 파룬궁 탄압 이후 전국적인 장기이식 산업으로의 발전 과정을 설명할 수 있는 단초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사형장 의사의 증언

 

 

폐쇄적인 중국 북부 지역에서 발생하는 사건을 알려면 가끔은 10년 전, 또는 그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1991년 가을, 임시 수술실로 개조된 소형 승합차량 한 대가 광저우(廣州)시 남부 교외 산길을 달리고 있었다. 차안에는 의료팀과 중산(中山)의대에 배치된 지 얼마 안 된 젊은 의사가 타고 있었다. 이윽고 차는 한 공터에서 멈춰 섰다. 근처에서는 이미 여러 대의 승합차량이 주차되어 있었다. 차체는 모두 백색으로 창문은 갈색, 외관에는 붉은 십자가가 선명했다. 현장 경찰들은 의료인들에게 차안에서 대기하도록 지시했다. 차창 밖에는 한 줄로 된 긴 선과 이미 묻힌 낡은 구멍 및 판지 얼마 안 되는 새로운 구멍이 보였다. 사형장으로서 이미 오랜 세월 사용되어 왔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이번 사형되는 사형수는 36명으로 이들의 72개 신장과 각막은 현지 병원에 배분된다. 각 승합차에는 숙련된 의사가 대기하고 있었으며 15~30분 이내에 장기적출을 완료할 수 있었다. 그리고 병원으로 돌아와 6시간 이내에 이식을 실시한다. 이미 모두들 손에 익숙해 있어 적출시 심장이 손상될 우려는 없었다.

 

지난 10년간 중국 의학계의 신속한 발전으로 인해 지금까지 폐기되어 왔던 장기들이 낭비되지 않게 됐다. 그 사정은 공개되지 않고 있지만 의대 교실에서 교수들은 학생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일부 흉악범은 스스로 장기 제공을 원한다. 그것은 그들의 마지막 참회다.”

 

제1진의 총성이 울려 퍼진 후 승합차에 문이 열리고 경찰복 위에 흰 상의를 걸친 두 명의 경찰이 시신을 옮겨 왔다. 그들의 손과 다리는 아직 희미하게 경련하고 있었다. 젊은 의사가 생각한 대로였다. 총탄은 우측 흉부 상단에 박혀 있었다. 세 구의 시신이 옮겨 들여온 후 의사들은 일을 시작했다.

 

남자, 40대, 한족(漢族), 신장을 제외한 그 외의 장기는 아마 폭리를 취할 수 있는 외국인에게 팔릴 것이다. 사전에 의사들에게 건네진 자료에 의하면 이 남성의 신장은 50대 중국인 남성에게 이식된다. 조직 적합성 검사는 이미 끝났다. 만약 이식을 받지 않으면 그 남성의 여생은 길지 않을 것이다. 이식 후 그는 앞으로 25년간 살 수 있을지도 모른다. 25년 후인 2016년이 되면 중국에서 거부 반응을 억제하는 약물을 개발해 간장이나 폐, 심장 이식까지 추가하면 이 남성은 또 앞으로 10년이나 15년 더 살 수 있을지도 모른다.

 

제3호 시신에는 특별한 표지가 없고 단지 그 목 주위에 보라색 상처 자국만 보였다. 의사들은 즉시 알았다. 때때로 죄수가 법정에서 떠드는 것을 막기 위해 금속 줄로 그 목을 휘감아 놓는다. 그는 아마 히스테릭한 살인범 또는 폭도, 혹은 정신착란 상태였을지 모른다. 중국의 형벌 시스템은 마치 고기를 갈아버리는 기계처럼 완고한 범죄자를 대량으로 처형한다. 젊은 의사는 마음속에 희미한 의혹이 일었다. ‘얼마나 중한 범죄를 범했다 하더라도 이렇게 장기를 무단으로 적출하는 것은 인도주의에 어긋나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곧바로 자신을 설득시키려고 했다. ‘이 적출 수술은 산부인과 의사와 차이가 있는가, 장기 적출로 다른 생명을 다시 살리면 항생제 혹은 호르몬제 개발처럼 의학의 진전 아닌가.’ 한편으로 이런 생각도 지나갔다. ‘그런데 그의 발언권이 박탈된 것은 혹시 정치범이기 때문이지 않을까….’

 

19년 후 유럽에 모 지역, 신변 안전이 보장된 장소에서 당시 이 젊은 의사는 이상의 사실을 증언했다. 그는 나에게 익명을 보장해 줄 것을 강력하게 요구했다. 중국 의학계의 권위자들은 대부분 장기 제공자가 사형수라고 인정하고 있다. 하지만 외국으로 떠났다고 해도 중국 의사들은 통상 이 같은 장기이식에 참여한 것을 말하기를 거부한다. 왜냐하면 그것을 언급하면 국제의학 권위자들도 피하고 싶은 화제에 접근하기 때문이다. 이는 중국에서 급증하는 사형 집행, 혹은 사형수 장기약탈이라는 화제가 아니다. 그것은 바로 장기적출을 이용해 종교인과 정치범들을 계획적으로 소멸시킨다는 사실이다.

 

 

 

위구르인 경찰의 증언: 지옥의 비명

 

 

지난 2년 반 동안 내가 접한 위구르인, 경찰, 의사, 경비원 등은 가족 혹은 장래에 부정적인 영향을 두려워하면서도 통역을 통해 나에게 단편적인 정보를 알려주었다. 그들은 자신의 직장, 가족, 나아가서는 생명까지 위험할 수 있었지만 이미 각오를 한 것으로 보였다. 그들의 증언은 죄악의 전 과정을 폭로했다. 살아있는 인간의 장기를 적출해 거액의 이윤을 얻는 것뿐만 아니라 광범위하게 존재하는 죄악과 폭행의 뿌리까지 폭로했다.

 

신장(新疆) 위구르자치구는 평소부터 중국공산당 정권의 숨겨진 실험 거점이었다. 1960년대, 로프노르(羅布泊) 주변지역은 핵 실험장으로서 사용됐기 때문에 우루무치 시의 암 환자는 폭증했다. 최근 타림 분지의 사막 지역에는 강제 노동수용소도 만들어졌는데 그 규모는 아마 세계 최대일 것이다. 추산으로는 위구르인이나 반체제인사, 파룬궁수련자 등 약 5만 명을 수용할 수 있다. 신장 지역은 정치범의 장기를 산채로 적출하는 범죄가 시작된 발상지다.

 

1989년, 20세가 갓 지난 니자드 압둘라임은 경찰학교를 졸업해 우루무치 공안국 제1분국에 배속됐다. 중국에서 경찰의 주요 임무는 공산당에 대한 위협을 근절시키는 것이다. 니자드는 한족이 대다수를 차지하는 공안기관에 최초로 들어갈 수 있었던 몇몇 위구르인들 중 한 명이었다. 그의 임무는 위구르인, 특히 주요 위구르 인물에 대한 조사로서 ‘상냥한 경찰’로 위장하는 것이었다. 내가 처음으로 니자드를 만난 것은 로마 교외의 좁은 난민 캠프였다. 야윈 그는 의기소침해 있었고 경계심이 강했다.

 

니자드는 당시 일을 이야기해 주었다. 공안국에서는 한족 경찰 동료가 늘 자신을 감시하고 있었기에 그는 그들이 좋아하는 소박하게 웃는 얼굴을 늘 연기하고 있었다. 1994년이 되자 니자드는 정부의 각종 비밀시설에 출입할 수 있게 됐다. 예를 들면 구치소, 고문실, 사형장 등이었다. 그 사이에 그는 그곳에서 고문, 처형, 윤간 등을 볼 수 있었다. 어느날 사형장에서 돌아온 한족 동료가 매우 어두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는 호기심에 동료에게 이유를 물어 보았다. 동료의 이야기에 따르면 보통은 죄수를 사형시킨 후 큰 구덩이에 떨어뜨리거나 쓸모 있는 시신은 현장에서 대기하는 장기적출용 승합차로 옮긴다. 그러나 그 날 이 한족 경찰은 차량 속에서 큰 괴성을 들었다. “인간의 비명 같은 소리였어.”

 

니자드는 동료에게 물었다. “아직 살아 있었어? 어떤 소리였지?”

 

“그건 지옥의 비명이었어.”

 

하지만 니자드는 별로 놀라지 않았다. 이미 이곳에서 엉성한 처리 방식들을 늘 봐왔기 때문이었다.

 

수개월 후, 세 명의 사형수를 구치소에서 사형장으로 이송하던 니자드는 그 중의 한 젊은이와 친해졌다. 그 젊은이는 도중에 니자드에게 한 가지 질문을 했다. “왜 나에게 주사를 놓은거죠?”

 

주사는 니자드가 아니라 동행하던 의료 담당자가 놓은 것이었다. 니자드는 거짓말을 했다. “당신이 총탄을 맞을 때 고통을 덜어주려고 그래요.”

 

그 말을 들은 젊은이는 허탈하게 웃는 표정을 지었다. 니자드는 그의 표정을 한 평생 잊을 수 없을 것이라고 했다. 그를 사형시킨 후 그는 의료 담당자에게 물었다. “왜 주사를 놓았죠?”

 

“니자드씨, 만약 다른 부서로 갈 수 있다면 빨리 그러는 게 좋겠어요.”

 

“무슨 뜻이죠? 도대체 어떤 주사를 놓은 거죠?”

 

“니자드씨, 당신은 신앙이 있나요?”

 

“네, 있습니다. 당신은요?”

 

“그 주사는 혈액의 응고를 막는 약물입니다. 니자드씨, 우리는 지옥에 떨어질지도 모릅니다.”

 

 

 

외과의사 “난 사람을 죽였다”

 

 

내가 엔버 토흐티와 만난 것은 런던에 있는 위구르족 교류 사이트였다. 그는 매우 상냥한 얼굴에 목소리도 부드러웠지만 조금은 허스키했다. 공영 주택에 사는 망명자 엔버에게도 비밀이 있었다.

 

이 이야기는 1995년 6월 어떤 화요일에 시작했다. 우루무치시 병원 외과의사였던 그는 그 날 상사인 외과주임에게 호출을 당해 심상치 않은 대화를 주고받았다.

 

“엔버, 우리 지금부터 매우 자극적인 일에 참가한다. 자네는 야외에서 수술을 해본 적이 있나?”

 

“아니오. 제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

 

“팀을 구성해. 구급차도 준비하고. 내일 아침 9시에 전원 집합이다.”

 

다음날 아침은 날씨가 쾌청했다. 엔버는 조수 두 명과 마취과 의사 한 명을 인솔해 구급차에 탑승했다. 외과주임 차가 앞장섰고 우루무치시를 나와 서쪽 방향으로 향했다. 구급차 안은 야외에서 소풍이라도 하는 분위기였다. 그러나 차가 서쪽 산악 경계지역, 즉 정치범들을 전문적으로 처형하는 장소로 들어가자 일행은 이변을 눈치챘다.

 

외과주임의 차는 작은 산으로 연결되는 비포장 도로 입구에서 멈춰섰다. 그리고 그는 차에서 내려 구급차로 다가와 말했다. “총성이 들리면 차로 산 저쪽 편으로 가게.”

 

“우리가 왜 여기에 왔습니까?” “엔버, 알고 싶지 않으면 묻지도 말게.”

 

“아니, 알고 싶습니다.” “아니야, 자네는 알고 싶지 않을 거야.”

 

외과주임은 그를 잠시 흘겨보고 자신의 차로 돌아갔다. 작은 산 저쪽 편에는 무장 경찰의 모습이 희미하게 보였으며 주변에는 민간인도 서있었다. “시신을 회수하거나 총탄 비용을 내려는 유족일지도 모른지.” 엔버는 농담조로 말했다. 동료들도 썰렁한 농담을 하며 모두들 긴장된 분위기를 완화시키려 했다. 곧바로 총성이 울렸다. 일제 사격 같은 소리였다. 그들은 차를 몰고 처형 현장으로 달려갔다.

 

차가 미끄러지는 것이 두려웠던 엔버는 외과주임 차를 겨우 따라가며 주변 상황을 볼 여지가 없었다. 10에서 20개구의 시신이 산 아래에 가로 놓여 있었다. 구급차가 온 것을 눈치챈 무장 경찰들은 그들에게 손짓했다.

 

“이거야, 이거!”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져 있던 시신은 30세 정도의 남성이었다. 그는 전신에 파란색 옷을 입고 있었으며 다른 죄수는 모두 머리를 빡빡 깎았지만 이 사람만은 장발이었다.

 

“바로 그야. 지금부터 수술을 시작한다.” “왜 수술을 합니까?” 엔버는 남성의 경동맥에 손을 대며 질문했다. “이미 이 사람은 죽었습니다.” 하지만 엔버는 곧 얼어붙었다. “아닙니다, 그는 아직 죽지 않았습니다.”

 

“빨리 시작해! 간장과 신장을 적출해. 빨리! 빨리!”

 

외과주임의 지시대로 모두가 ‘시신’을 구급차로 옮겼다. 엔버는 자신이 마치 로봇과 같이 움직인다고 느꼈다. 우선은 가위로 옷을 찢고 시신을 테이블에 고정시키며 그 다음은 복부를 절개한다. 가능한 한 매뉴얼 대로 소독을 실시하고 절개 부위를 최소화 하며 절단면에 선을 그었다. 그리고 그는 주임을 보며 물었다. “마취약을 사용하지 않습니까?”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아도 좋다”라는 말이 되돌아 왔다. 마취과 의사는 팔짱을 끼고 옆에서 무지한 시골 농민처럼 멍하니 보고 있었다. 엔버는 그에게 외쳤다. “왜 아무것도 하지 않지?” “내가 뭘 하면 좋지? 엔버, 그는 이미 감각이 없어. 자네가 그를 잘라내도 반응하지 않을거야.”

 

그러나 ‘시신’은 반응했다. 엔버의 메스가 들어간 순간에 남성의 흉부는 경련하고 움츠러들었다. 엔버는 그 때 극도의 공포를 느끼고 외과주임을 향해 물었다. “어느 정도 깊게 자릅니까?” “가능한 한 깊게 잘라. 시간이 별로 없다.”

 

엔버는 재빨리 장기를 적출하기 시작했다. 오른손으로 자르고 왼손으로는 근육이나 연부조직을 밀어냈다. 목적지인 신장과 간장을 깨끗하게 절제한 후 겨우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그리고 절단면을 봉합하고 시신의 외관이 갖춰지게 했다. 내부 봉합은 이미 필요 없었다. 그 때 엔버는 이 남성이 아직 살아 있다고 느꼈다. 엔버는 속으로 외쳤다. ‘나는 사람을 죽였다!’ 엔버는 그 남성의 얼굴을 똑바로 보지 못했다. 마치 살인범이 피해자를 보는 것처럼 두려웠기 때문이다.

 

그리고 의료팀은 조용히 우루무치시로 돌아왔다. 다음날 외과주임은 엔버를 호출했다. “어제는 아무 일도 발생하지 않은 거야. 어제는 모두 정상적이었어.” 엔버는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오랜 세월 후 그는 겨우 알았다. 인간이 살아 있을 때 적출한 장기는 이식할 때 거부 반응이 적다는 것을. ‘가슴에 맞은 총탄이 어느 정도 그에게 마취 작용을 했을테지.’ 15년 후, 그는 당시 수요일에 발생한 일을 겨우 입에서 꺼낼 수 있었다.

 

 

 

 

 

정치범 처형과 ‘장기적출 특수차량’

 

 

1997년 2월 2일부터 바티야 셈시딘는 자신이 이름뿐인 경찰이 아닌지 의심하기 시작했다. 2년 전부터 그는 신장위구르 자치구의 이닝(伊寧)시 시청(西城) 공안국의 마약단속팀에 들어갔다. 키가 크고 미남에다 덩치가 좋았던 그는 이 일자리와 잘 어울리는 것 같았다. 이후에 자유를 추구해 캐나다로 건너온 그였지만 당시에 자신의 의지를 잘 기억하고 있었다. ‘나는 한족의 협력자가 아닌 긴급사태의 구원자다.’

 

몇 년 전부터 헤로인이 이닝 지역에서 범람했다. 이 마약은 마치 중세의 전염병처럼 위구르인 젊은이들을 침식하고 있었다. 그러나 바티야는 곧바로 눈치챘다. 헤로인 밀수는 당국에 의해 방임되고 있었으며 뒤에서는 오히려 당국의 보호를 받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을 마약단속관으로 채용했던 것도 함정이었다. 한족 상사는 그에게 마약 판매원을 단속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메스렙(Meshrep)을 조사하게 했다. 메스렙은 위그르족의 전통 모임으로 여러 가지 전통문화들과 음악, 춤, 드라마, 민속극, 게임 등 같은 공연예술들이 풍부하게 집약되어 있다. 메스렙이 만약 헤로인의 침입을 저지하는 한약처럼 유행하게 되면 한족 통치자들에게 있어서 확실히 ‘특수한 위협’이 된다.

 

1997년 1월초, 단식이 끝나는 라마단의 밤, 이닝시 경찰 당국의 위구르족과 한족 경찰 전원이 검사를 위해 권총 회수를 명령받았다. 약 1개월 후 권총은 반환됐지만 바티야의 몫은 없었다. 그는 담당 한족 간부에게 이유를 물었다.

 

“자네 권총은 문제가 있어.”

 

“언제쯤 고칠 수 있습니까?”

 

그 질문에 간부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소지 명부를 살짝 보고 그에게 “자네는 이제 가도 좋네”라고 말했다.

그 날이 끝날 무렵 그는 알았다. 한족 경찰은 전원 총이 지급됐으며 위구르족 경찰들의 총은 모두 ‘문제가 있었다’.

 

3일 후, 바티야는 자신에게 총이 지급되지 않은 이유를 알 수 있었다. 2월 5일, 약 1천 명의 위구르인이 이닝시 중심부에 모였다. 전날 6명의 여성이 한족 당국에 체포됐다. 체포된 여성들은 이슬람교 교사이자 메스렙 참가자이기도 했다. 정보에 의하면 그녀들은 고문을 받았다고 했다. 이날 시위에 모인 위구르족 젊은 남성들은 두터운 겨울옷을 입지 않았다. 그것은 어떠한 무기도 소지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사전에 계획됐든지 어떠했는지는 모르지만 한족 경찰들은 그들에게 향해 총을 발포했다.

 

이닝 사태 사상자 수는 지금도 확실히 알 수 없다. 바티야의 기억에 의하면 경찰 내부 추산으로 약 400명이 사망했다. 그러나 그는 살해 현장에 들어갈 수 없었다. 위구르인 경찰 전원은 ‘죄수 고문’ 임무를 집행하기 위해 현지 감옥에 파견됐기 때문이다. 바티야는 감옥에서 많은 위구르인들이 나체로 차디찬 눈 속에 방치된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 중에는 피를 흘리는 사람이나 내장이 손상된 사람도 있었다. 또 이닝시의 주요 위구르인 병원들도 강제 휴업이 실시됐으며 한족 특수경찰이 의사 10명을 체포하고 병원 응급차를 파괴했다. 4월말이 되자 체포자가 급증해 감옥은 더 이상 수용할 수 없게 됐다. 그리고 매일 같이 위구르인 정치범들이 처형되기 시작했다. 4월 24일, 그의 동료는 정치범 8명의 총살 현장을 목격했다. 그곳에는 ‘장기적출 특수차량’과 의사가 대기하고 있었다.

 

 

 

이닝시 간호사 “군병원, 시위대 장기 팔아먹어”

 

 

나는 위구르인 간호사 한 명을 유럽에서 만났다. 그녀는 이닝(伊寧)시에서 일어난 위구르족 시위 사건 당시에 현지 대형 병원에 근무하고 있었다. 그녀는 증언에 앞서 매우 긴장했으며 자신의 개인정보가 유출되지 않도록 수차례 요구한 후에야 입을 열었다. 

 

그녀에 따르면, 당시 병원은 위구르인 시위대에 대한 치료를 금지하고 있었다. 시위대 부상자에게 붕대를 감아준 의사는 징역 15년, 응급 치료를 실시한 의사는 징역 20년을 받았다. 병원 관계자는 “만약 시위대를 치료해주면 그들과 같은 처우를 받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한족과 위구르족 의료인들의 대우 역시 격차가 컸다.


한족 의사는 약국 열쇠를 보관하고 있었으며 위구르족 의사는 약국을 자유롭게 출입할 수 없었다. 또 위구르족 환자에게 처방하는 약의 분량도 절반으로 제한됐다. 위구르족은 한족과 달리 둘째 아이 출산이 법률로 허가되고 있었다. 그러나 산부인과에 있던 한족 의사는 위구르족 유아에게 자주 ‘항생제’를 주입했다.

 

이 간호사에 따르면 한족 유아들은 이 같은 주사를 맞지 않는다. 주사를 받은 유아는 보통 3일 안에 전신이 보라색이 되며 사망한다. 이에 대해 한족 의사는 위구르인 산모에게 보통 이렇게 둘러댄다. “당신의 아기는 너무 약해서 약물을 견딜 수 없었어요.”

 

이닝 사건 직후 위구르족 젊은이 시신 한 구가 군 병원에서 자택으로 반환됐다. 그러나 복부에 봉합된 상처를 보고 장기가 적출됐다는 의심이 든 위구르인들은 또다시 시위를 벌였다. 그 후 위구르인 시신들은 반환되지 않고 모두 사형장 내에 묻히게 됐다. 한족 군인이 현장을 삼엄하게 경비했는데 이러한 시신 매장지는 우루무치시 공항 가까운 곳에도 있었다.

 

그후 이 간호사는 또 새로운 사건을 만났다. 체포되어 고문을 당한 한 위구르인 시위자는 가족이 큰 돈을 지불한 후 집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이 위구르인은 고문으로 인해 신장이 심하게 손상됐다. 우루무치시에 있는 한족 군병원 의사는 진찰을 한 후 가족에게 “신장 한 개는 3만 위안(약 5백만원)”이라며 이식을 제안했다. 의사는 또 신장 공여자는 21세 위구르인 남성으로 매우 건강하다고 설명했다. 나중에 이 간호사는 신장 공여자 역시 시위 참가자인 것을 알게 됐다.

 

 

 

“정치범 장기적출은 당연한 일”

 

 

1997년 초가을, 신장위구르 자치구 농촌지역에서 혈액검사를 하던 위구르인 젊은 의사 무라트(가명)는 우루무치시 모 대형병원에서 의사로 일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2년 후 그는 유럽으로 탈출계획을 세웠고 몇 년 후 나는 그를 유럽에서 만날 수 있었다.

 

무라트가 우루무치에서 근무하던 어느 날, 그의 지도교수는 그에게 한 가지 비밀을 알려주었다. 지도교수에 따르면 5명의 한족 고위관리가 병원에서 진찰받은 결과 장기 손상이 발견돼 장기이식이 필요했다. 교수는 무라트에게 “우루무치시 감옥에 가서 형사범이 아닌 정치범 혈액검사를 하게. 소량의 혈액을 채취해서 혈액형만 조사하면 돼”라고 말했다.

 

“적합한 장기 기증자를 찾는 건가요?” 무라트는 물었다.

 

“무라트, 지금은 아직 그런 일을 생각하지 않아도 좋네. 그런 건 다음에 생각하도록 하게. 지금은 당장 혈액형이 필요해.”


무라트는 위임장을 손에 든 다른 한 명의 조수를 따라서 15명의 몸집이 큰 위구르인 앞에 섰다. 이 죄수들의 연령대는 25~30세였다. 첫 번째 죄수는 자리에 앉아 주사바늘을 보았을 때 진지하게 물었다. “당신은 나와 같은 위구르인인데 왜 나를 해치려 하지?”

 

“나는 당신을 해치지 않습니다. 단지 혈액 검사만 할 뿐입니다.” 그런데 ‘혈액’이라는 말이 울려 퍼진 순간 현장은 아수라장이 됐다. 죄수들은 울고불고 날뛰기 시작했다. 간수들은 소리를 지르면서 죄수들을 대열로 밀어 넣었다. 한 죄수가 “나는 결백해!”라고 소리를 지르자 간수는 그 죄수를 목을 잡고 짓눌렀다.


“당신의 건강을 위해서입니다.” 무라트는 침착하게 말했지만 순간 동행한 조수가 자신을 감시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는 무라트가 동족에게 동정심을 품고 있는지 감시하는 것 같았다. “이것은 건강 진단입니다.” 무라트는 재차 반복했다. 병원으로 돌아와 그는 교수에게 물었다. “그 죄수들은 모두 사형수인가요?” 지도교수는 “그렇네, 무라트. 하지만 이제 더 이상은 묻지 말게. 그들은 악인이야. 국가의 적이지”라고 대답했다.


하지만 무라트의 머릿속은 의문투성이였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는 차차 그 상황을 알게 됐다. 일단 적합한 혈액형이 발견되면 장기적합성 검사에 들어간다. 그리고 기증자로 정해진 정치범 오른쪽 가슴에는 총탄이 박힌다. 무라트의 지도교수는 사형장에서 그 장기를 적출하고 그것을 기다리고 있는 고위관리에게 이식한다. 그리고 그들은 병상에서 일어나 퇴원한다.

 

6개월 후, 이닝(伊寧)시 설립 축제 기간에 새롭게 5명의 고위관리가 입원했다. 지도교수는 또 무라트에게 정치범 채혈을 지시했다. 지도교수는 말했다. “정치범의 장기를 적출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네. 장기 매매는 날마다 증가해서 수요가 많지. 군 병원은 이 분야의 선구자야.”

 

1999년 상반기, 무라트는 정치범들에 대한 장기적출 얘기를 더 이상 듣지 못했다. 그는 장기 매매가 중단됐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러나 사실상 신장위구르의 장기적출 매뉴얼은 전국으로 광범위하게 확산되고 있었다.

 

 

 

베이징올림픽 전까지 파룬궁수련자 6만5천명 장기적출 당해

 

 

1999년 7월 20일, 마오쩌둥(毛澤東) 시대 이후 최대 규모의 탄압운동인 파룬궁 소멸운동이 시작됐다. 그 규모는 위구르족 탄압을 훨씬 넘어섰다. 내가 조사한 통계자료에 따르면 약 3백만 명의 수련자가 강제노동수용소와 감옥에 투옥됐으며, 2008년 베이징올림픽까지 약 6만5천명의 수련자가 살아있는 상태에서 장기가 적출돼 사망했다. 또 기독교 가정교회나 티베트인도 같은 처지에 놓였지만 상세한 데이터는 아직 수집하지 못했다. 그렇지만 이들 희생자는 파룬궁수련자에 비하면 아마 매우 적을 것이다.

 

이 자료는 아마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의 유태인 대학살에는 미치지 않을지도 모른다. 중국 정부는 자국 의료체계에서는 도덕성이 충분히 지켜질 수 없다는 것을 최근 시인했다. 외국인 투자자들은 중국이 언젠가 장기적출을 중단하고 더 많은 이윤을 얻을 수 있는 약물과 임상실험 산업으로 전향할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 견해는 기쁜 일이지만 중요한 것은 많은 보고서, 적어도 1년 전 보고서에 따르면 이미 설명한 신장위구르의 장기적출 매뉴얼이 아직 폐기되지 않았다.


2009년 7월, 신장위구르 자치구 우루무치에서는 위구르족과 한족간 폭력충돌이 발생했다. 중국 당국은 우루무치에 군대를 파견하고, 해외언론을 강제 퇴출시키고 인터넷을 통제했다. 그리고 6개월간 많은 위구르인 남성들이 비밀리에 체포됐다. 그들은 대부분은 심야에 연행됐다. 체포된 경험이 있는 위구르인에 따르면 그들의 장기가 건강한지, 밀매할 수 있는지 판단하기 위해 그들 중 일부는 건강진단을 받았다.

 

이 정보에서 한 가지 결론을 이끌어낼 수 있다. 즉, 급격히 발전하고 있는 슈퍼대국 중국은 인권만 유린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에 불과하다. 지난 10년 이상, 이 나라는 사람들이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의료체계를 악용했는데 인권법률 전문용어로 말하면 “계획적으로 특정 단체를 소멸하려 하고 있다.”

 

부디 모든 국가들이 이 사건의 원인과 경위를 알면 좋겠다.

 

그러나 위구르인 경찰이었던 니자드 압둘라임(위구르인 경찰의 증언: 지옥의 비명의 증언자)이 스위스 뇌샤텔 난민보호시설에 머물면서 난민으로 받아줄 국가를 기다리고 있을 때, 그는 나와 한 다른 사람에게 진상을 이야기했다. 그러나 중국 당국과 대립하고 싶지 않는 국제정세 속에서 어느 나라도 그의 증언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위구르인 외과의사 엔버 토흐티(외과의사 “난 사람을 죽였다”의 증언자)는 영국 하원에서 열린 중국 인권문제 심포지엄에 참가했다. 한 의원의 질문을 받았을 때 그는 일어서서 자신은 사람을 죽였다고 처음으로 공개 실토했다. 당연히 나는 메모를 했지만 유감스럽게도 그의 연락처를 메모하는 의원과 직원은 한 명도 없었다.

 

국제사회의 메시지는 명확하다. ‘위구르인은 자신의 힘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1,300만명의 위구르인. 인구는 그다지 많지 않지만 그들은 절망적인 지경에 처해있다. 그들은 무력으로 항쟁하거나 경우에 따라 전쟁을 일으킬 것이다. 그 날이 오면 전 세계 정치인들은 중국 당국에 대화를 요청할 것이다. 그 때 모든 국가들은 사건 발생의 원인과 시시비비 그리고 그 경위를 알아보기 바란다. 내가 한 유태인에게서 배운 것은 “망자의 원한을 완전히 해소할 수는 없지만 잔혹한 약탈과 압제를 강요당하는 민족이 영원히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